간절한 기대와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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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정돈ㆍ 작성일2017-01-1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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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4
지난 6월 6일 자 크리스챤 헤럴드지의 A 2 면의 데스크 칼럼의 주제는 “오늘의 교계에 고함”이었다. 내용을 요약하면, 최근 각 교단 총회에서 일어난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들에 대하여, 그리고 목회자들의 신앙인으로서의 인격의 결함, 예배와 삶의 불일치 등에 대해 열거하면서 회복에 대한 간절함을 주문한 글로 많은 목회자들, 그리스도인들이 공감하는 내용이라 생각한다. 각자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들이야 있겠지만 그 방법이 문제다. 기독교 지도자들로서 감정을 절제하고 이성적, 신앙적으로 판단하고 질서를 따라 행했다면 고성, 몸싸움, 갈라짐은 면할 수 있지 않았겠나? 그리고 처음으로 총회에 참석하는 젊은 후배 목회자들에게도 좋은 본이 되어 감동을 주지 않았겠는가?
결국 하나님의 영광도 가리우게 되고, 서로 간에 큰 상처를 주고받는 불편한 관계가 되어 버렸다. 물론 목사라고 완전할 수는 없으나 그러나 적어도 크리스챤 지도자들의 기본 모습은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모든 것을 품격있게, 질서있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다 유익하거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덕을 세우지 않으면 더 이상 감동을 줄 수 없고 다른 이들의 동의도 이끌어낼 수 없다.
바울서신을 보면, 바울이 사역의 전략과 확장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사역자의 바른 신앙과 인격, 삶의 모습, 영적훈련이었다. 그는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 환경적 장애물, 인간관계의 장애물, 삶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자신의 출옥, 건강, 장수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그리스도인, 사도로서의 신앙인격자로 주님 앞에 서기를 소원하며 이런 고백을 했다.
첫째로, “아무일에도 부끄럽지 아니하고” 바울은 사역에 못지않게 인격, 삶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스도인 모두도“아무일에도 부끄럽지 않은 신앙, 인격, 삶이”되어야 할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어느 분이 쓴 글이 좋아 인용하며 추가해 보았다.
“우리가 가난을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게으르고 나태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문벌이나 학벌이 좋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삶에 진실치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용모가 아름답지 못해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마음이 더럽고 추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체구가 왜소하다고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마음이 좁살같이 작은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교인 수, 예배당 건물이 작다고 부끄러워하지 말고, 가정과 주어진 사역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본을 보이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인간의 인간됨은 그의 자랑과 부끄러움이 무엇이냐에 따라 구별될 수 있다. 당연히 부끄러워해야 할 일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부끄러워하는 우리는 아닌가? 오늘 우리는, 자기 자신 앞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남이 모르는 것 나 자신이 더 잘 안다. 또한, 나의 아내, 자녀들, 내가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 이웃들 앞에,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몸부림쳐야 한다.
둘째로,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바울은 주님을 만난 후 사도가 되어 복음의 사역을 감당한 노년까지 모든 일에 담대하였다는 것이다. 어떻게 담대할 수 있는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힌 죄나 거리끼는 것이 없어야 할 것이다. 물질문제, 이성문제에 있어 깨끗해야 할 것이다. 신앙년륜, 목회경력을 자랑하기보다 그리스도를 더 많이 닮은 성화된 내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주어진 삶과 사역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전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가 해군사관학교 졸업 시 제독이 그에게 “귀관은 지난 4년 동안 최선을 다했는가?” 라 물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그러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는 평생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 한다.
셋째로,“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원했다” 나는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고 오직 주님만 존귀하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살고 죽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살아도 주를 위해 살며, 죽어도 주를 위해죽으며, 주님만 존귀하게 하는 삶이라 고백했다. 그러면“그리스도만 존귀하게 하는 삶”은! 내 몸(언행)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김으로 주변 사람들을 감동 시키며, 삶과 사역을 통해 내 이름이 아닌 주님의 이름만 높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주의 복음을 통한 영혼구원과 교회개척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더 아름답게 확장되어 갈 것이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귀한 사역에 부름을 받은 자들로 이런 기대,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2013년 6월 / 미주크리스천신문
지난 6월 6일 자 크리스챤 헤럴드지의 A 2 면의 데스크 칼럼의 주제는 “오늘의 교계에 고함”이었다. 내용을 요약하면, 최근 각 교단 총회에서 일어난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들에 대하여, 그리고 목회자들의 신앙인으로서의 인격의 결함, 예배와 삶의 불일치 등에 대해 열거하면서 회복에 대한 간절함을 주문한 글로 많은 목회자들, 그리스도인들이 공감하는 내용이라 생각한다. 각자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들이야 있겠지만 그 방법이 문제다. 기독교 지도자들로서 감정을 절제하고 이성적, 신앙적으로 판단하고 질서를 따라 행했다면 고성, 몸싸움, 갈라짐은 면할 수 있지 않았겠나? 그리고 처음으로 총회에 참석하는 젊은 후배 목회자들에게도 좋은 본이 되어 감동을 주지 않았겠는가?
결국 하나님의 영광도 가리우게 되고, 서로 간에 큰 상처를 주고받는 불편한 관계가 되어 버렸다. 물론 목사라고 완전할 수는 없으나 그러나 적어도 크리스챤 지도자들의 기본 모습은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모든 것을 품격있게, 질서있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다 유익하거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덕을 세우지 않으면 더 이상 감동을 줄 수 없고 다른 이들의 동의도 이끌어낼 수 없다.
바울서신을 보면, 바울이 사역의 전략과 확장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사역자의 바른 신앙과 인격, 삶의 모습, 영적훈련이었다. 그는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 환경적 장애물, 인간관계의 장애물, 삶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자신의 출옥, 건강, 장수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그리스도인, 사도로서의 신앙인격자로 주님 앞에 서기를 소원하며 이런 고백을 했다.
첫째로, “아무일에도 부끄럽지 아니하고” 바울은 사역에 못지않게 인격, 삶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스도인 모두도“아무일에도 부끄럽지 않은 신앙, 인격, 삶이”되어야 할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어느 분이 쓴 글이 좋아 인용하며 추가해 보았다.
“우리가 가난을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게으르고 나태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문벌이나 학벌이 좋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삶에 진실치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용모가 아름답지 못해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마음이 더럽고 추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체구가 왜소하다고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마음이 좁살같이 작은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교인 수, 예배당 건물이 작다고 부끄러워하지 말고, 가정과 주어진 사역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본을 보이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인간의 인간됨은 그의 자랑과 부끄러움이 무엇이냐에 따라 구별될 수 있다. 당연히 부끄러워해야 할 일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부끄러워하는 우리는 아닌가? 오늘 우리는, 자기 자신 앞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남이 모르는 것 나 자신이 더 잘 안다. 또한, 나의 아내, 자녀들, 내가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 이웃들 앞에,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몸부림쳐야 한다.
둘째로,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바울은 주님을 만난 후 사도가 되어 복음의 사역을 감당한 노년까지 모든 일에 담대하였다는 것이다. 어떻게 담대할 수 있는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힌 죄나 거리끼는 것이 없어야 할 것이다. 물질문제, 이성문제에 있어 깨끗해야 할 것이다. 신앙년륜, 목회경력을 자랑하기보다 그리스도를 더 많이 닮은 성화된 내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주어진 삶과 사역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전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가 해군사관학교 졸업 시 제독이 그에게 “귀관은 지난 4년 동안 최선을 다했는가?” 라 물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그러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는 평생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 한다.
셋째로,“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원했다” 나는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고 오직 주님만 존귀하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살고 죽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살아도 주를 위해 살며, 죽어도 주를 위해죽으며, 주님만 존귀하게 하는 삶이라 고백했다. 그러면“그리스도만 존귀하게 하는 삶”은! 내 몸(언행)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김으로 주변 사람들을 감동 시키며, 삶과 사역을 통해 내 이름이 아닌 주님의 이름만 높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주의 복음을 통한 영혼구원과 교회개척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더 아름답게 확장되어 갈 것이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귀한 사역에 부름을 받은 자들로 이런 기대,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2013년 6월 / 미주크리스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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